서론
어렸을 때부터 하던 생각들을 모아 하나의 글로 쓰고자 한다.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이후 사람에 대한 논의를 할 때 대부분의 개념들을 상속할 수 있도록 하여 불필요한 모호함을 제거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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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정의
정의의 모호함
생명이 무엇인가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것의 개념을 모호하지 않도록 정의하는 것이 당연하게도 우선되어야 한다. 실제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개념의 모호함 때문이라기보다는 물질 세계에 포함된 객체의 특성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물질적이거나 정량적으로 정의한다기보다는 관념적으로 정의될 수 밖에 없다. 아울러 시스템의 특성이라는 관점에서도, 어떤 유기체적인 시스템 전체를 생명으로 정의할 것이냐, 아니면 시스템이 보이는 특성들으로 말미암아지는 일련의 특성들로 해당 시스템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정의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나는 전자의 의견을 고수하고자 한다. 이는 이전 세기에서 진행되었던 철학적이거나 윤리적인 논의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유물론적이거나 물리학적인 관점을 견지함으로써 논의 대상의 모호함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간축에서의 문제
그러나 그러한 관점을 고수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생명에 대한 아주 정확한 정의는 다음의 문제들로 인해서 성립되기가 어렵다. 먼저 생물이 하나의 시점에서는 정의될 수 없다는 점을 살펴보자. 하나의 시점에서 포착한 물질의 상태들과 그 물질이 놓인 3차원 공간을 “스냅샷(snapshot)“이라고 하자. 이 스냅샷 안을 살펴보면 모든 원자의 이동이나 에너지의 이동은 완전히 정지하고 있다. 그 안에서는 유기체 안에서도 물질이나 에너지를 교환하는 등의 그 어떤 상호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분자 구조들에서도 생명활동이라고 볼 수 있을 만한 것들은 일어나지 않으므로 모든 개체는 스냅샷 안에서 죽어 있다. 이는 생명이 시간적으로 여러 스냅샷에 걸쳐 있는 존재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만약 개체가 시간적으로 존재하는 개체라면 시간이 연속적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따라 문제가 달라지게 된다. 만약 뉴튼 역학에서 전제하는 것처럼, 시간이 연속적이라서 무한히 쪼갤 수 있다면 여러 스냅샷 내에 존재하는 대상의 연결성이 자동적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시간이 연속적이라고 볼 실험적이거나 이론적인 근거는 희박하다. 물질 세계에서의 미시적 탐구들이 많은 양자성이나 불연속성을 밝혀낸 것들을 보면, 시간의 경우에도 불연속적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럼 문제는 각 스냅샷에서의 죽은 개체들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바뀌게 된다. 이는 난해한 문제이다. 연속성이 제거된 시간 $t$에서의 스냅샷 속 개체와 시간 $t+1$의 스냅샷 속 개체의 연결성을 무엇을 기준으로 인정할 것인지는 모호하다. 직관적으로 생각하기에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경우로 설명할 수 있으나, 무엇을 기준으로 같은 공간을 정의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간단하게 생각해 보아도, 한 시점에서의 사람과 1초 뒤의 동일한 사람의 위치는 우주의 팽창이나 행성의 공전 등으로 매우 빠르게 변화한다. 변화하지 않는 축을 기준으로 위치들을 측정할 수 있다고 해도 양자 시간만큼의 차이가 있는 두 스냅샷 내의 개체가 완전히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는 성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 연결성의 문제는 시간 $t+1$에서의 스냅샷에서의 한 개체가 $t$의 스냅샷에 존재하는 무한대에 가까운 개체 중에서 어떤 개체의 가장 정통성 있는 계승자인가를 찾는 매칭 문제가 된다. 이 문제는 휴리스틱하게 해결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두 시간에서 존재하는 두 개체는 공간의 변화로 인해 어떠한 특성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간축에서의 문제
공간축에서 생명체를 전제하는 것도 모호함을 내재한다. 앞선 논의에서 한 스냅샷 내에서는 생명체를 정의할 수 없다고 한 바 있고, 정지 시점에서 생명체가 점유한 공간을 정의하는 것은 우리의 직관에도 어긋나므로 편의상 생명체가 $\Delta t$만큼의 시간동안 존재한다고 하자. 이 시간 내에서는 모든 스냅샷에서의 개체의 연결성의 성공적으로 확보되었다고 가정하여 공간에서의 논의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상적 측면
생명체가 점유한 공간은 어디까지인가?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위상적으로 연결되어 함께 움직이는 조직들의 집합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소화기관 내부는 위상적으로 신체의 외부이므로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위상적으로 외부에 포함된 장내 세균이나 기체들을 모두 일시에 제거하였을 때 개체는 생존할 수 있는가? 개체가 가지고 있던 생명에서의 특성들을 모두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 이 점들을 고려하면 단순히 연결부분들을 떼어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개체가 출산이나 외상, 세포의 채취 등으로 둘 이상으로 나누어졌을 때에는 어떤 개체를 본래 부모 개체의 가장 적법한 계승자인가를 논하는 문제도 난해하다.
사실 그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는데, 거시적 관점에서의 위상은 실제로는 허상이라고 볼 만한 것이다. 생명체와 그 세포를 이루는 원자 구조는 최근의 화학의 발전으로 인해 자세히 살펴보았을 때 대부분이 빈 공간이라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완전히 접촉된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므로 위상적 논의는 그 자체로 관념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운더리를 설정할 때, 어떤 분자들 혹은 원자들이 생명체에 포함된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새로 하여야 한다. 예컨대 살아 있는 세포들은 생명체에 귀속된다고 하자. 그럼 생명체에 붙어 있는 죽어 있는 세포들의 경우에는 포함하여야 하는가? 포함하여야 한다면, 생명체가 입고 있는 옷, 넘어서 생명체가 발 딛고 있는 건물이나 행성, 또는 대기의 기체들은 생명체로 인정하여야 하는 문제로 확장될 수 있다. 여기에서의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순전히 관념적인 문제로 바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