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에 관한 논의
에로스의 종말 (220504)
에로스는 전근대사회까지 타동사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욕망이다. 각 개인은 다른 개인에 의해 욕망의 대상이 될 기대를 가졌었다. 그러나 이 양상은 근대사회로 접어들며 해체되었다. 마르크스Karl Marx가 지적했듯,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관계를 금전적으로 환원시켰다. 이에 더해, 사회관계망의 발달과 인구 수 증가는 각자의 상대방을 유일무이한 선택지가 아니라 무한대의 선택지 중 가장 경제적인 선택으로 전락시켰다. 상대로부터의 피선택(被選擇)도 모순적이게도 피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애시장 풀 내에서 본인을 상품화하여 전시하는 능동적인 판매로 달성된다. 상품의 광고를 위해 후기근대사회까지도 완고한 비밀로 남아있던 프라이버시의 영역까지 인터넷 상에 공공연하게 전시된다.
정보가 지나치게 많은 상황에서는 사랑할 상대방에 대한 상상과 환상이 끼어들 틈이 없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한 번 세상 밖 이데아의 완전한 정보를 대면한 개인은 다시 무지(無知)의 동굴 안으로 돌아와도 그림자를 보고 상상할 수 없다.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환멸 뿐이다. <햄릿>의 오필리아가 죽음에 이르는 에로스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도 햄릿에 대한 정보의 현저한 부족 때문이었다.
바타유Georges Bataille는 에로스적 행위의 기본이 “대상이 평소 유지하던 폐쇄적 존재구조를 파괴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의 폐쇄적 존재구조는 바타유가 말했던 나신(裸身) 이상의 사생활의 비밀로 확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자본축적을 위해 프라이버시를 모조리 처분해버린 오늘날 개인들에게는 잔존하는 폐쇄성이 없다. 비밀은 한 번 공개되면 무기력하다. 이런 무기력한 개인들의 집합인 현대의 연애는 따라서 만인과의 사랑이거나 무성애적이다.
아름다움과 생식력 (220507)
개체의 아름다움은 그 개체의 생식력에 비례하는 것 같다. 다른 種의 개체를 볼 때에도 이 규칙은 유추되어 他種의 번식에 공헌할 여지를 만들어 相扶相助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예컨대 강렬한 색조의 꽃잎과 붉게 무르익은 과일을 보고 매료되는 것은 그 개체의 자손을 퍼뜨릴 여지를 확대시킨다.
이런 생각은 기후별 植生의 外形에서도 그 근거를 직감할 수 있는 것이다. 척박한 지역에서 자라난 花草는 그 외형이 흉하고 촉감마저 배타적이다. 반면 태양에너지가 충분하게 공급되어 잉여로 방탕하여도 문제되지 않는 곳의 수목은 그 빛깔마저 청초하고 생명력이 充滿하다. 기실 봄의 화초는 건장한 청년에게서 만개하는 에로스를 연상케 한다.
‘아도니스의 멧돼지’의 바타유적 해석 (220512)
한병철의 저서 <에로스의 종말>에서는 희랍 신화의 아도니스와 그를 죽인 멧돼지 이야기 1를 인용하면서 에로스가 아토포스(atopos)적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던지는 행위임을 강조한다. 다만 에로스의 열정을 현시하기 위한 예시로 이용되는데 그친 이 이야기는 바타유George Bataille의 관점에서는 더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아프로디테의 저주로 인해 뮈라와 그의 아버지 키니라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아도니스는 대단히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하다. 아프로디테는 그를 가까이 두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잠시 아프로디테가 자리를 비운 사이, 사냥을 나갔던 아도니스는 거대한 멧돼지가 달려들어 그의 엄니에 고간을 크게 다친다. 뒤늦게 아프로디테가 달려오지만 아도니스는 사망한 뒤였다.
바타유는 에로스적 행동을 불연속적 주체의 폐쇄성을 파괴하는 폭력행위로 규정한다. 그의 관점에서 살인금기의 위반은 심연 속에 고립된 개인을 향하여 이루어지는 신성한 구원이다. 이는 사드Marquis de Sade가 말한 “죽음과 친숙해지기 위하여는 죽음을 방탕에 결부시키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는 말이 내포하는 바에 다름 아니다. 각 개인은 주체 안에 나르시시즘적으로 침잠할 때 불연속적 개체로서 죽음의 전염병과 함께 소멸하지만, 오히려 개체의 소멸을 약속하는 에로스와 함께 개인과 집단의 영원성을 획득한다.
즉 멧돼지의 충돌은 아도니스에게는 그의 고립을 파괴하는 심연으로부터의 구원이자 그에게 영원성을 선물한 영웅적 행위이다. 이는 에로스가 선물하는 파괴적 연속성의 기치와 일치한다. 실제로 멧돼지는 아도니스를 들이받은 후에 “나는 그 젊은 미소년을 다치게 하려던 것이 아니다. 난 그저 내 에로틱한 엄니로 그를 애무하려고 했을 뿐이다.(it had not meant to injure the beatiful youth with his ’eroticized teeth(erotikus odontas)’—only to caress him.)“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멧돼지의 그 엄니는 따라서, 아즈텍의 신성한 축제이자 잉여소비수단으로서의 전쟁이기도 하다. 멧돼지가 실제로는 아레스의 변신이라는 해석은 이를 뒷받침한다.
다만 누군가는 내 주장에 대해서 반박하면서, 실제로 아도니스는 사망 후에 명계로 이동하면서 영원성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페르세포네와 아프로디테 사이를 오가는 더 강한 불연속성만을 획득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겉보기에 정당한 주장이지만 희랍신화에서의 신이 이성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표상이 아니라 “하찮은 이성이 규정하는 합목적성"과 일치하는, 희랍인들의 나르시시즘적 자화상에 불과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쪽이 옳다.
인간의 무위성에 대한 생각 (220615)
인류의 지식축적과 그로 말미암은 기술발전은 인간을 풍요롭게 한 적이 없다. 신기술의 유일한 책무는 인류의 인구 수용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인류가 위기에 직면하면, 인구 성장은 지체되었고, 지식으로 이를 돌파하면 새로운 국면이 접어들 때까지 인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때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계는 무한에 가까운 개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번잡스럽고 혼미한 관경이다. 2 인간의 대량생산과 대량사망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대혼란의 중심에서 개인의 목가는 애초부터 어불성설이다. 불연속적인 개체는 짧은 생애 기간 동안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조금이나마 축적한 무엇이라도 죽음과 함께 영원히 소멸한다. 죽음은 절대적 손실을 의미한다. 3
혼미의 급류에서 고고하게 무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연속적인 개체 뿐이다. 하지만 현대 유물론은 모든 종류의 연속성을 물질세계 내로 끌어들여 해체시켰다. 바타유George Bataille이 죽음과 함께 개체가 연속성을 획득한다고 한 말은 달콤한 거짓이다. 따라서 연속성의 권위는 개체의 관점에서 착각을 유발하는 수천 년 단위의 미시적 불연속 개체에게 전이되었다. 이런 개체는 실제 유기체라기보다는 봉건 사회와 같은 범유기체적 시스템이다. 맑스Karl Marx가 현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해서 “sorcerer who is no longer able to control the powers of the neither world whom he has called up by his spells"라고 한 맥락은 이와 일치한다.4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무위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행동은 덜 불연속적인 개체에 기여하는 것 뿐이다. 푸코Michel Foucault는 신자유주의가 시민사회의 자유를 달성시켰다고 보았는데, 신자유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자유의 박탈을 규율하는 생산의 원천을 다원화했을 뿐이다. 생산된 자원 중 일부는 가치생산에 소비되는데, 이는 개체에게 귀속된 후 사망과 함께 소멸하므로 모두 무의미한 낭비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개인들을 가치생산의 공장 안에서 채찍질하면서 완전히 무가치한 삶으로 전락시킨다. 개인은 일생동안 가치를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무가치해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지식축적에 기여하지 않는 인간의 노동은 무의미하므로, 인간 개체에게 남은 유일한 의미는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이다. 지식축적을 위한 수단으로 희생된 개인은 미노타우로스에게 바쳐진 아테네의 인신공희에 비유할 수 있다.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칠 테세우스적 영웅은 지식축적의 종료이자 정지사회의 도래이다. 정지사회의 존재는 인류에게 메시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사회가 억겁의 축적 끝에 반드시 정지상태로 귀의할 것이라는 믿음은 신자유주의가 촉발하는 탐욕을 정당화시키는 묵시록적 계시이자 새로운 도그마가 되었다.
정지사회는 모든 이에게 영생을 부여하여 인류가 상실한 삶의 의미를 반환시키고 불연속성이라는 개체의 한계로 인해 빼앗긴 인간의 권력을 반환하는 유토피아이자 그 자체로 사후세계인 천국이기도 하다. 아무도 태어나거나 사망하지 않으므로 혼미하지 않다. 안정과 행복으로 충만한 절대자의 삶을 영위한다. 정지사회의 도래 전 개인들이 기술발전을 위해 투신하는 것, 정지사회로 가는 길목의 모든 희생이 무시가능한 문제로 전락하는 것 또한 이를 위해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는 스캠이다. 기술발전의 완성은 원시적으로 불능이다. 이는 또다시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불연속성에 의해서 촉발된다. 모든 관찰은 주체 외부의 사건과 그로 인해 유발된 내적 체험으로 구성된다. 과학 연구가 타인으로부터 수행되었을 때, 그 연구와 그 연구를 받아들이는 주체 사이에는 불연속적 존재 사이의 무한한 심연이 가로막고 있다. 요컨대 직접 건네받은 물리적 자료라도 저승의 사자가 은연 중 별자리로 보내는 비밀스러운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모든 연구는 해독하여 작자의 내적 체험을 제거하는 정제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치 번데기가 껍질을 깨고 나올 떄 그것은 바깥 세계로의 저항이 아니라 자신의 파멸을 의식하는 순간이듯이 인간의 내적 체험도 그렇게 얻어진다.”3 따라서 모든 과학 연구는 개인에 의해서 다시 수행된 후 집대성되어야 한다. 이는 불가능하다.
아울러 인간은 인간이 놓여있는 물리세계와 그 동물적 특성 때문에 모든 정보를 저해상도의 2차원 정보로 수집한다. 2차원이 넘는 고차원의 정보들이나 고해상도의 정보들은 모두 2차원 정보의 병렬화를 통해 시간축을 더하여 최대 3차원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인간의 시간축 정보는 끊임없이 망각에 의해 결실된다. 시간축 정보의 결함으로, 각 개체가 온전하게 파악 가능한 것은 초점 상의 매우 적은 2차원 정보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 방법론은 대단히 한계적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말하고 기록할 수 있는 것은 대단히 추상화된 모델에 불과하여 보잘것없다. 어떤 경험에 대한 수십 여편의 글귀나 연구도 기실 그 체험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이로 인해 시간은 인간 개체에게 결코 반환될 수 없다. 미래 인류는 달성될 수 없는 것을 좇는다는 점에서 불행하고 무의미하다. 불행과 무의미로 구성된 영겁의 시간은 그 자체로 지옥이다.
피식(被食)의 고상함에 대하여 (230520)
얼마 전 과외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앳되어 보이는 한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자신을 근처 대학의 신입생으로 소개한 그는 곧바로 발표 준비를 도와달라는 핑계로 종교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나를 설득하려는 노력들은 기쁘게 생각하여 그와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 일이 희미해져 가던 요즈음, 문득 그가 해 주었던 이야기 중 일부가 떠올랐다. 며칠 뒤면 특별한 날이니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어야 사후세계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는 성체성사(聖體聖事)라고 해서 영성체(領聖體)인 빵과 영성혈(領聖血)인 포도주를 먹는 의식인데, 그가 믿는 종교 뿐 아니라 정교회나 카톨릭에서도 행하는 중요한 미사 의례 중 하나로 그 근거는 코린토1서 11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생각해보기에도 여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다. 당시에도 이에 대해 지적했으나 아쉽게도 그는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깊게 고민해보지 않은 듯 했다.
먼저, 사람이 무엇인가 입에 집어넣고 먹는 것은 가장 추한 행위여야 한다. 단순히 생각해보기에도, 모두 부끄럽게 생각하여 마지않는 나신(裸身)의 안쪽에는 대개 소화를 위한 흉측한 장기들이 그득하게 들어차 있다. 배설을 포함한, 이 장기들의 메커니즘의 작동을 암시하는 취식 행위는 말하자면 나신의 나신의 나신, 세 번 벌거벗은 몸이다. 자신의 내부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게 수치스럽게 생각되는 것이라면, 입으로 무언가 집어넣는 게걸스러운 행위에도 그러한 속성은 상속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예수의 피와 살을 집어먹는 행위를 카톨릭에서는 문자 그대로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 경우 카니발리즘(cannibalism) 금기를 범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문제가 있다.
이 두 문제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미 논박될 수 있지만, 내 방식으로 두 문제를 해석해보고자 한다.
생명체는 사망하고 나면 의식은 사라지지만 몸뚱아리는 그대로 남겨놓는다는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전에 생명체를 정신과 육체의 조합으로 보던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둘을 분리하는 오해를 하기도 했지만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자면 남겨진 것은 그 생명체의 전부이면서도 거대한 고깃덩어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바타유Georges Bataille의 관점을 다시 가져오지 않을 수 없는데, 일전에 내가 생각한 바(220615, 220512)와 같이 죽음은 개인을 무한한 심연으로 밀어넣는 절대적 손실이다.
특히 내가 (220615)에서 주장한 것은 따라서 영겁의 시간 속에서 개인에게 주어지는 찰나를 연장하는 방법은 범유기체적 시스템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기에는 이와 같은 추상적 시스템은 의식의 기반에서 상상되는 것이므로 무의하다고 생각된다.
혹자는 그러면 후손을 계속해서 남기면 되지 않겠느냐 할 수 있으나, 자식을 남기는 것도 개체를 물리적으로 연장하는 방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후손은 정보의 복제본일 뿐, 실질적인 물리적 연결고리는 생식세포 하나에 불과하므로 개체 자체가 연장된다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예컨대 내 의식의 디지털 복제본이 생성되었다고 내가 영생을 얻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과 같다.
반면에 피식(被食, 잡아먹히는 행위)은 개체의 물리적 연결고리를 그대로 유지하는 놀라운 방법이다. 내가 가진 물리적 구성요소를 새로운 유기체에게 그대로 옮겨가 새로운 의식을 형성한다. 즉, 나의 포식자는 나의 가장 적법한 후계자인 셈이다. 성체성사도 예수의 육신을 섭취함으로써 유월절 이후 사망한 예수의 의식을 제자들이 계승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기왕이면 고등 동물에게 피식되는 것이 좀 더 고차원적인 의식을 유지하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조로아스터교나 티벳에서 행하는 조장(鳥葬)은 꽤 괜찮은 후생을 약속하는 윤회법인 셈이다. 반면 구더기 한 마리 먹을 것도 남겨놓지 않고 시신을 화장장의 한 줌 재로 만들어버리는 요즘의 장례법은 과연 모두를 심연으로 몰아넣는 한심한 장례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