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튜브에서 아주 흥미롭게 본 영상이 있다. ‘Ты только маме, что еду в Бахмут, не говори’라는 노래를 러시아 군인이 부르는 비디오인데 1, ‘엄마에게 내가 바흐무트 (Bakhmut)에 간다고 말하지 마’ 정도로 번역되는 제목이다. 본래 러시아-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병사들 간 구전되던 군가 ‘Привет Сестрёнка (안녕 누나)’와 제1차 체첸 전쟁의 ‘Ты только маме что я в Чечне не говори (엄마에게 내가 체첸에 있다고 말하지 마)’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최대 격전지인 바흐무트 (Бахмут)로 바꾸어 부른 버전이다.
서방 세계 중심으로는 침공을 한 러시아가 단순한 악당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해당 영상의 댓글란에서도 러시아를 비난하기보다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하는 글이 대부분이다. 폐허가 된 도심지 가운데에서 기타를 치며 고향에 있을 어머니를 걱정하는 마음을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중무장한 겉모습 속에 있을 여린 젊은이를 측은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비난의 화살은 정치가들을 향하게 된다. “전쟁은 늙은 정치가들이 일으키고 피는 젊은이들이 흘린다”는 오랜 격언처럼 전쟁을 일으킨 푸틴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인 것 같고,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의 악을 한 개인에게 떠넘길 수 있어 간편하다.
그러나 요즈음 생각에는, 사람은 그렇게 악하기에는 충분히 똑똑하지 않은 것 같다. 본인이 한 선택으로 인해 발생할 모든 결과들을 고려할 수 없기 때문에 의도가 충분히 악할 수 없다. 예컨대 사라예보 사건을 일으킨 가브릴로 프린치프 (Гаврило Принцип)는 자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에는 괴로워했지만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cannot feel himself responsible for the catastrophe”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2.
보스니아의 치기어린 세르비아인 청년보다 더 많은 결과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큰 죄책감을 느꼈던 것 같다. 2차 대전에서의 핵무기의 참상을 경험한 위대한 과학자들은 대부분 열성적인 반전 운동가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경우에는 “If I had foreseen Hiroshima and Nagasaki, I would have torn up my formula in 1905.”라고 말한 바 있고, 맨하탄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오펜하이머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Mr. President, I feel I have blood on my hands.” 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푸틴의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최전선의 러시아 군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이 받을 고통을 고려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는 푸틴이 의도적으로 간과했다기보다는 그것이 한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경험할 개인적 고통의 산술적인 합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초과하는 것이다. 제2차 체첸 전쟁으로부터 현재의 입지를 얻었던 푸틴의 좁은 시야에서는, 눈 앞에 당면한 대내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가 전쟁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류사에서 발생하는 거대한 악의 책임을 짊어질 수 있는 개인은 없는 것 같다. 나치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아이히만을 넘어서 특별한 변명의 여지 없이 절대악의 근원처럼 생각되는 히틀러나 괴벨스의 경우에도 그들의 행동에 따른 모든 결과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그만한 악을 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